감정은 적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는 힘이 된다.

  살다 보면 누구나 힘든 순간을 마주한다. 그럴 때면 주변 사람들은 위로의 말을 건넨다. “기운 내”, “밝게 생각해”, “좋은 게 좋은 거지” 같은 말들이다. 처음엔 그 말들이 따뜻하게 느껴지지만, 시간이 지나며 우리는 알게 된다. 그 말들 속에 담긴 무언의 요구가 있음을 알게 된다. “슬퍼하지 마”, “분노를 드러내지 마”, “불안은 숨겨야 해.” 마치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그런 감정들을 멀리하려 하고, 애써 무시하는 방법을 익히게 된다. 나도 그랬다. 억울한 일도 웃어넘기려 했고, 속상한 마음도 꾹 눌러두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나도 풀리지 않은 감정들이 마음속 어딘가에 남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무심한 말 한마디에, 낯익은 장면 하나에 그때의 감정이 불쑥 되살아난다. 억눌렀던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도망쳐도, 외면해도, 결국은 다시 돌아오고 만다. 그렇기에 부정적인 감정은 결코 가볍게 넘겨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주해야 할 나의 일부이다.

 

  감정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불안은 내가 지금 어떤 위협을 느끼고 있는지를 알려주고, 분노는 내 안의 소중한 가치가 침해되었음을 외친다. 슬픔은 놓아야만 하는 것들에 대한 아픔을 알려주고, 외로움은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은 간절함을 전한다. 이처럼 감정은 무거운 짐이나 방해물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지키는 신호이다. 내가 어디쯤에 있는지를 알려주는 삶의 나침반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소중한 신호를 외면하거나 눌러버리며 살아간다. 그러면 할수록 나 자신과는 멀어지고, 마음의 감각은 흐려진다. 단단하게 살아가기 위해선 감정을 정확히 느끼고, 표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감정을 솔직하게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나에게 더 친절해질 수 있다. 감정을 표현한다는 건 단순히 푸념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이해하고 치유하는 유일한 통로이다. 감정은 나를 괴롭히는 적이 아니라, 나와 대화하고자 다가오는 친구일 수 있다.

 

  나는 여전히 감정을 잘 안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감정이 나에게 보내는 신호라는 걸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감정을 억누르기보다 옆에 두는 연습을 하고 있다. 감정과 가까워진다는 건, 그 감정이 왜 찾아왔는지, 어떤 상황에서 반복되는지를 나에게 묻는 과정이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다 보면, 마음속에서 나를 무겁게 하던 감정의 얼굴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물론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곁에 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방법이다. 감정을 옆에 두고 바라볼 수 있을 때, 그것은 나를 보호하는 감각이 된다. “감정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훨씬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결국, 감정과 가까워진다는 건 “나는 언제나 괜찮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우리는 매일 긍정적일 수 없고, 가끔은 무너지고 슬퍼지고 분노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여전히 사랑하고 기대하고 있다는 신호이다. 흔히 사랑의 반대말을 미움이라 말하지만, 진짜 반대는 무관심이다. 감정이 없다면, 우리는 이미 모든 것에 등을 돌린 상태일지도 모른다. 감정을 느끼고, 그것에 흔들린다는 것은 그만큼 삶에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감정을 들여다보는 시간은 곧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지금 나는 어디쯤 서 있고, 무엇에 아파하고, 어떤 길을 가고 싶은지 감정이 알려준다. 삶의 방향은 꼭 목표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감정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 감정은 삶의 등불이 될 수 있다. 그 빛을 피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더 나다운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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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근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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