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순간에는 살아가는 것이 벅찬 경우들이 있다. 반복되는 일상, 예상치 못한 고난, 피할 수 없는 상실감들이 삶을 짓누른다. 그럼에도 인간은 버티며 살아간다. 삶을 포기하지 않고, 부여잡고 살아가는 이유는 무얼까?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어서일까? 이루고 싶은 꿈들을 이루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자신이 가진 어떤 신념에 의한 힘일까? 유대계이며 오스트리아 정신과 의사이고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클린'의 저서 『죽음의 수용서에서』라는 책에서 삶의 의미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다고 한다. 자신이 경험한 것을 토대로 작성하고 책을 냈다고 한다. 전주 ME 정기총회에서 특강을 해주신 신부님이 읽고 들려주신 이야기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며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들이다. 인간이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은 무엇인가? 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강제노동으로 어려움을 겪는 환경에서 희망을 가지고 생존을 포기하고 쓰러져 갔다. 희망을 놓지 않았던 한 남성으로 인해 희망의 원천이 무너졌을 때 한 인간도 함께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다. 빅터 프랭클은 수용소의 한 남성 이야기를 소개했다. 전쟁이 몇 월 며칠에 끝날 것이라는 것을 꿈을 통해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항상 웃을 수 있었고, 고통동 참아내었으며, 얼굴에는 희망이 가득했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을 계속되고 들려오는 이야기는 전쟁이 더 지속되고 있는 것이었다. 꿈에서 들었던 날짜가 다가와도 전쟁이 끝나지 않자, 그는 그날 다음날 철조망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희망이 사라지자, 그는 더 이상 삶을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한 것이다. 삶은 의미를 찾는 과정이다. 무엇을 삶의 의미로 삼고 있는가? 만약 그것이 사라진다면 여전히 삶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인가?
삶을 지탱하는 힘
많은 이들이 삶의 가장 큰 의미는 '가족'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헌신하고, 자녀는 부모를 사랑하며, 형제자매는 서로 의지하는 존재이다. 가족은 기쁨을 주는 동시에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가족이라는 끈은 버릴 수가 없다. 가족이라는 존재가 삶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대체될 수 없다. 성경 속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의 이야기는 가족 사랑을 잘 보여 준다. 특히 어머니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당시 히브리 남자아이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하지만 요게벳은 자신이 아들을 지키기 위해 갈대상자에 넣어 나일강으로 띄워 보낸다. 그는 훗날 히브리 민족을 해방시키는 지도자가 된다. 요게벳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그런 선택을 한 것이다. 모세는 그녀의 삶 자체였을 것이다. 가족은 가장 중요한 존재이며 극한의 고통을 견디는 힘이 된다.
수용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이들이 가족을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비참한 환경 속에서 견딘 것이다. 삶을 지탱하는 힘은 관계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매일을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한다.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함께 생각한다. 빅터 프랭클은 "왜 살아야 하는 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라고 한다. 삶이 항상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항상 행복한 것도 아니다. 요즘 보내는 시간들이 그렇다. 나에게 죽음의 수용소가 오는 것은 아닌지 라는 생각도 든다. 불평과 불만을 가지지 말자고 했더니 "내 머릿속이 코끼리"처럼 불평과 불만이 늘고 있다. 이런 현상이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두드러진다. 머리가 굵어지면서 던지는 말들이 매섭기만 하다. 아빠로서 얼마나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다. 아니 모든 것의 원인이 아빠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라는 책 내용을 들으면서 마음에 다가온다. 퇴직을 하고 우선으로 생각했던 것이 가족과의 관계개선이다. 만나는 친구들과 비교를 하며 "다른 친구들은 괜찮은데 왜 아빠만 그래"라는 표정과 말투들이다. 그리 많은 시간은 아닐지 모르지만 노력하고 노력을 해도 개선이 되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일까? 가족과의 행복의 시간을 꿈꾸는 것에 어떤 것들을 바꾸어야 하는가? 머릿속은 혼돈의 상태이다. 계속 이런 상태로 가게 되면 죽음의 수용소에서 전쟁이 끝나는 날을 기다리는 남자처럼 그 시간이 오지 않으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생각이 든다. 이런 순간을 잘 보내는 것 중요한데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다. 그래서인지 삶에 대한 행복을 자꾸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하나 보다. 점점 고립된 삶으로 가게 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행복이라는 울타리를 쳐 놓고 있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그 울타리는 이미 다른 것들이 무너뜨려 버린다. 다시 아침부터 쌓아 놓지만 저녁이면 또 무너져 버린다.
죽음의 수용소의 남자는 삶의 의미가 가족을 만날 수 있는 희망이었다. 희망이 사라지는 순간이 오면 인간은 무너지고 만다. 빅터 프랭클 희망을 기다리던 남성의 이야기가 내게 울림을 주고 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유가 "그날이 오면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 속의 삶이었지만, 희망이 사라지면서 남성의 삶의 의미도 완전히 잃어버렸다. 많은 이들의 삶이 사람과 이별하고, 가족을 잃게 되면 살아갈 이유를 잃어버리고 만다. 오늘 미사 시간 중에 들었던 성경말씀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내가 되었습니다.(코린토 1서 15장 10절)"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강론 중 신부님의 말씀에 공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전주 ME 정기총회에서 가정사목국 신부님의 특강을 듣고서 이해를 하게 되었다. 그것은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는 것이 "조건"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전쟁이 끝나야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도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임을 말이다.
삶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고난들이 있다. 감당하기 어렵기도 하고, 삶의 의미와 행복이 무너지는 때도 있다. 그럴수록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내 삶의 의미는 어디에서 오는가? 빅터 프랭클이 강조한 것처럼 주어진 상황 속에서도 스스로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아야 한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가족이, 꿈이, 신념이 삶을 살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희망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일수록 더 새로운 의미를 찾고 행복을 찾아 나가야 한다. 언제까지나 가족과 함께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삶이 주는 의미와 행복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게 되면 시련이 온다고 해도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지금 당신은 어떤 의미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만일 그것이 사라진다면 어떤 새로운 의미를 찾을 것인가? 잠시 고민해 보길 바란다.
백근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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