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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근시대의 삶(50대의 하루의 삶)

좋아하지 않는 음악에 경청한다는 것은?

by Coach Joseph 2023.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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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지 않는 음악에 경청하는 것은 삶에 중요한 가치를 제공하게 하는 것처럼 삶 속에서 좋아하지 않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음악에 경청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조용한 곳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하는 것이다. 때론 광란에 미친 음악을 틀어 놓고 혼자서 소리를 지르며 부르며 듣기도 하고, 때로는 조용한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차분하게 하게 하기도 한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뇌의 주파수에 맞추어 음악을 듣는다. 좋아하지 않는 음악에 경청하는 경우에 다양한 일들이 있을 것이고, 자신을 개방적으로 바뀌게 하는 조금은 독특한 경우들이 생기게 된다. 삶 속에서 인간의 감성을 자극함으로써 삶의 동기에 접선하게도 한다.

 

  좋아하지 않는 음악을 듣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초월하게 한다. 감정이 전달되어진 음악은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고 이해하는 힘을 준다. 평소 즐겨 듣지는 않지만 감정선이 달리 형성되어지게 되면 차 안의 데시벨을 높여서 차가 들썩 거릴 정도의 음악을 틀어놓고 도로 위를 달릴 때가 있다. 감정이 힘들고 그 순간을 떨쳐 버리고 싶은 마음에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한다. 편안한 음악만을 듣는 것이 아니고 헤비메탈 급으로 음악을 크게 틀어 놓는다. 평상시라면 상상하거나 할 수 있는 용기가 없는 데도 새로운 문을 열어 놓게 한다.

 

  이렇게 틀어 놓고 듣다보면 어느새 그 음악에 경청하게 된다. 그리고는 따라 부르기 시작하고 반복하여 듣게 되며 자연스럽게 그 음악이 내 것으로 소화된다. 그렇게 해서 듣게 된 노래가 지드래곤의 "삐딱하게"이다. 50이 넘은 사람들이 따라서 부른다는 것은 조금 어려운 노래임에도 크게 틀어 놓고 듣다 보니 어느새 흥얼흥얼 따라 부르고 있다. 차 안에서 음악을 틀을 기회가 별로 없음에도 감정이입이 되면서 부르게 된 노래이다. 잠깐 가사를 몇 자 적어보면, "영원한 것은 절대 없어 (생략), 내버려 둬 어차피 난 혼자였지. 아무도 없어 다 의미 없어 사탕 발린 위로 따윈 집어 쳐 오늘밤은 삐딱하게" 지금도 가끔 어디선가 흘러나오면 흥얼댄다. 이처럼 자신의 감정의 순간에 따라 좋아하지 않는 음악을 들음으로써 감정을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좋아하지 않는 음악에 경청을 하게 되면 다양한 음악의 가치를 인정하게 된다. 정말 많은 장르의 음악들이 존재하며 다른 스타일들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아직도 이해가 안되는 종류의 음악이 있다. 힙합의 감성은 어느 정도 이해를 하기도 하는데 힙합랩은 아직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어릴 적 음악을 들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음악의 느낌이기도 했지만 음악의 가사였다. 왜 그런 것이 형성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노래 음절이 아무리 좋아도 노래 가사가 맘에 안 들면 즐겨 듣지 않았다. 아마도 가사에서 오는 중압감이 있을 수도 있다. 송대관은 많이 힘들게 음악활동을 한 것으로 안다. 남진과 송대관은 동시대의 사람이지만 남진은 데뷔 초부터 많은 히트곡들을 만들어 내지만 송대관은 근 10여 년이 다 되어서야 빛을 보게 된다. 송대관이 데뷔하고 10년 여가 지났을 때 발매한 곡이 "해 뜰 날"이다. 해 뜰 날의 가사를 떠올리면 "쨍하고 해뜯날 돌아온단다. 안 되는 일 없단다. 때가 되면은~~"이다. 이때 정말 쨍하고 해 뜨고 지금까지도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노래의 가사가 중요한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가수들의 죽음이 아이러니 하게도 노래 가사와 닮아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들이 종종 있었건 내용이다. 장덕의 죽음을 두고 많은 이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했던 기억이 난다. 중요한 것은 기억으로 89년에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를 발매하고 그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죽음을 예견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사랑의 이별을 다루는 듯한 가사이지만 "아직 모르는 곳이지만~~"이란 말과 제목이 매칭이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영향인지 노래 가사는 중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힙합 랩은 욕설이 난무하다 보니 아직도 나는 듣기가 거북하다. 그럼에도 가끔 귓전에 들려오는 음악과 노랫말에 귀를 쫑긋 세우게도 한다. 

 

  힙합 랩처럼 나와 다른 음악의 결을 이해하려고 하게한다. 전혀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 존재하고 다른 결의 무리들이 있는 것처럼 음악에도 다른 결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집의 채널에서 힙합 랩 채널을 막아 놓으니 아들이 유튜브로 보는 일을 만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름을 인정하라고 이야기하면서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것이기 때문이고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이야기만 하는 것처럼 나 스스로의 음악이 옳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결의 음악을 인정하고 들어보고 표현의 다양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좋아하지 않는 음악에 경청하는 것이고 그렇게 경청한 곳에서 새로운 창작의 경험이 생길지도 모른다.

 

  좋아하지 않는 음악을 경청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게 하고, 자신의 감정과 동화 되기도 하며, 위로를 받고, 새로운 창작으로 이어지는 경우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이어지며 삶의 방향성과 성장이 올지도 모른다. 어쩌면 음악에 숨겨진 보물을 찾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좋아하지 않는 음악에 경청하는 것은 삶에 중요한 가치를 제공하게 하는 것처럼 삶 속에서 좋아하지 않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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