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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근시대의 삶(50대의 하루의 삶)

자신의 기록을 승자의 것으로 만들자

by Coach Joseph 2023.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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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인전에 나오는 인물들은 정말 훌륭해서 훌륭한 것일까? 비판적인 사고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과연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정말로 그렇게 무능했고, 삼천 궁녀와 함께 낙화암에서 죽었을까?
기록

  기록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기록은 나의 흔적을 남기는 행동이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중요한 것 까지를 기록 한다. 그렇기에 주관적인 기록들이 난무한다. 어릴 적 학교에서 배운 국사라는 과목을 배우면서 "와~~ 이렇게 훌륭한 장수가 통일에 일조했구나!! 이렇게 훌륭한 왕이 이바지를 했구나!!"를 이야기하면서 위인전기를 읽고 자랐다. 

 

  기록은 승자의 것이다.

  위인전에 나오는 인물들은 정말 훌륭해서 훌륭한 것일까? 비판적인 사고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과연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정말로 그렇게 무능했고, 삼천 궁녀와 함께 낙화암에서 죽었을까? 그런 왕이 "계백"이라는 훌륭한 장수를 전장에 내보냈을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나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본다. 전쟁에서 이겨야만 하는 그리고 당나라 소정방을 끌어들여 삼국을 통일해야만 하는 당위성들을 설명하기 위해 백제의 의자왕을 그렇게 표현하고 기록했을지도 모른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정말로 그렇게 훌륭한 왕이고 장군이었을까?라는 의문점을 던져 본다.

 

  신라는 삼국중에 최약체 국가로 항상 침탈을 당하고 힘이 없었다. 그 당시 상황에서도 도저히 고구려나 백제를 이길 만한 국력이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의 죽음과 맞물려 정치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신라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당나라와의 연합전선을 펼쳐가며 백제를 짚 밟아 버린다. 마지막 전투인 황산벌 전투를 보면 정말로 무지막지한 전술을 쓴다. 당시 화랑이라고 하는 열몇 살 정도 되는 지금의 청소년들을 화랑의 이름으로 전장에서 죽게 만든다. 그렇게 신라를 위해 죽음을 당한 관창으로 인해 신라가 전화위복 되며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가? 사람의 목숨, 더군다나 아직 솜털이 채 가시지도 않은 아이를 전쟁에서 승리의 도구로 선택한 것이다. 이미 김유신은 어린 관창이 목숨을 잃을 것을 알면서도 이겨야 하기에 보낸 것이다. 

 

  일본의 가미가재와 다를바가 무엇인가? 일본의 가미가재와 할복은 손가락질을 하고 비 인간적인 행위이라면서 비난의 소리를 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신라의 김유신은 황산벌에서 계백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면서도 내보낸다. 이미 급이 다른 게임이었다. 그것뿐인가? 계백은 제일 앞장서서 싸웠고, 어린 관창을 차마 죽일 수 없었기에 여러 번 살려서 타 일렀다. 이것은 그만큼 관창은 어리디 어린아이였다는 것이다. 만약 관창이 아닌 김유신이 나서서 싸웠다면 어땠을까? 훨씬 더 인정을 받는 위인의 반열에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유신은 그러지 않았다. 계백의 5,000명의 정예군사에 밀리고 있었고, 이를 타계할 방법이 어린 생명을 희생시키고,  군사들의 울분을 만들어 이를 전쟁에 이용하려 한 것이다. 

 

  이 당시 리더십은 앞장서서 "나를 따르라"였다. 그러나 김유신은 "너를 따르마"인 것이다. 물론 이 전투 하나만으로 김유신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곳에서는 훌륭한 리더로서 전장을 누비기도 했을 것이다. 역사의 기록이라고 하는 것이기에 만약 백제나 고구려가 통일을 했다면 신라의 김유신은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김유신은 어쩌면 영웅이라는 위인전에 이름이 거론 되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혼자의 힘으로 백제를 물리친 게 아니다. 당나라와 함께한 것이다. 겨우 백제 정도를 물리치고, 통일을 했다고 한다. 이 얼마나 어이가 없는가? 고구려 땅의 조금을 얻고도 "삼국 통일의 대업"을 운운한다. 신라가 평양성 위쪽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발해의 힘이 컷을 수도 있다. 발해가 지속적으로 성장해 가고 당나라의 힘이 빠지는 순간에 평양성 까지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김유신을 비난하고 역사를 부정하고자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기록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기록은 승자의 기록이기에 승자들의 당위성이 들어가 있고, 적들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내용들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고구려를 깎아 내려야 했기에 "연개소문"의 독단적이고 표독한 것들을 기록하고 있고, 자식들도 그렇게 기록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것으로 "통일 신라"라고 하는 말대신 "남북국시대"로 정정해서 사용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지금 아이들의 국사책을 보지 못해서 이렇게 적는지는 모르겠지만, 위키백과에 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 후삼국시대로 되어 있어서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통일신라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TV를 볼 때 역사를 이야기하면 통일 신라라고 이야기한다.  

 

  기록은 주관적인 것이며, 소통이 된다.

  역사서에 나오는 것처럼 기록은 승자들의 몫이다. 역사의 기록은 승자들의 주관적인 모습으로 작성되어져 왔기에 100% 정확하다고 볼 수가 없다. 기록은 주관적이다. 현대의 삶 속에서 수만, 수천 가지의 정보들이 있다가 없어지고, 다시 생성되고를 무한 반복하고 있다. 매일매일 메모를 통해 적어나가고 기록한다고 이것이 다 자신의 것이 되지는 않는다. 정말 필요한 정보들만을 공유하기만 해도 책으로 수백 권은 넘을 것이다. 이 기록들은 찾아볼 수 있게 "아카이브"란 것이 지금의 인터넷 환경이다. 그러다 보니 정말 과다한 정보 속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찾는 것이 정말 어려울 때가 있다. 나 자신도 정말 많은 것들을 기록하고 있지만 정작 이것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나의 환경에 맞게, 상황에 맞게 기록하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갤럭시 노트를 사용할 때는 펜으로 노트에 작성을 많이 했다. 하지만 아이폰으로 바꾸고 나서는 기록을 하기가 어려웠다. 자판도 작아서 오타를 하루에도 열두번도 더한다. 요즘은 블루투스를 이용하면서 메모장을 정말 열심히 이용한다. 글에 대한 인사이트가 있으면 메모장에 적기 시작한다. 적다 보면 어쩔 때는 정말 많이 적어놓을 때가 있다. 그것을 보면서 글을 써나가는 경우들이 정말 많다. 

 

  우리들의 삶이 공허하다고 하면서 하소연하고, 사람들과 만나면서 술로서 풀어나가고 잠자리로 향한다. 이유는 뭘까? 우리들의 삶이 체계가 없어서이다. 자신의 공간을 만들고, 몰입과 휴식을 이어가며 나의 공허함을 달래주고 채워줄 수 있는 것들을 찾아야 한다. 이럴때 자신의 주관적인 기록들이 활개를 치며 메모장에 무작성 기관총을 쏘는 것처럼 난사를 한다. 난사된 글들을 블로그에 옮기고 이를 정제화 시키는 때도 있다. 이렇게 작성하는 주관적인 지식이나 생각들이 결국 우리들의 미래를 주관하게 된다. 결국 이렇게 시작한 메모가 글이 되고, 이 글이 문장이 되고, 단락이 되어 장을 이루고 책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

 

  기록은 소통의 것이 되어야 한다. 말로만 하는 것이 소통이 아니다. 말을 하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은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 말을 한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나의 생각을 전달하고 설명하는 것이고 상대방의 말을 통해 그의 생각을 엿보게 되어 서로 공감하고 소통하는 것이다. 글도 마찬가지이다. 나에게 전달되어져온 편지글을 읽고 상대의 맘을 알고, 공감하고, 그것에 대한 답신을 보냄으로써 상대방도 나의 맘과 생각을 알게 한다. 대화를 말로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서로 주고받는 글들을 통해 소통하는 것이다. 이것을 'Dialog'라고 한다 'dia(가로질러)'와 'log(말)'의 합성어라고 한다. 서로에게 가로질러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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