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없으면 단순한 가난일까?"
"돈이 없으면 선택할 수 있을까?"
"돈이 없으면 존엄은 유지될까?"
"돈이 없으면 관계는 어떻게 될까?"
돈이 없으면 선택할 수도 없는 현실
초등학교 4학년까지 비교적 걱정 없이 살았다. 장화를 신고, 재킷을 걸치고 다니기도 했다. 그 당시 그렇게 입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양복점을 하셨고, 그럭저럭 잘 운영이 되어서였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노는 것을 좋아하셨다. 돈도 많이 쓰시는 편이었다. 그래서 늘 주변에 친구분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런 분이 맞춤 양복이 기성복으로 대체되어 가면서 아버지의 사업도 시들해져 갔다. 그런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의 건강도 나빠지신 것 같다. 술도 못하시는 분이 술도 자주 드시기도 했고, 늦은 새벽녘까지 고스톱을 치시고 들어오시는 날이 많았다. 집에는 돈이 떨어져 가면서 부모님은 다투는 날들이 늘어만 갔다. 그런 시간들이 지나가면서 나의 고등학교 학창 시절에 아버지는 병원에 다니는 횟수가 늘어가고 입원을 하는 것이 반복이 되었다. 복수가 차오르고 숨을 몰아 쉬시면서도 다시 나오시면 일을 하신다고 나가셨다. 이제는 양복일을 할 수도 없었고, 그럴 기반도 없었다. 영업이라는 것을 하시면서 돈을 버시려고 하셨다. 그즈음에 어머니도 일을 하시기 시작했다. 매일 저녁이면 포장마차를 끌고 전주고등학교 근처 모퉁이에서 어묵을 팔고, 국수를 파셨다. 아직도 그 국수가 나는 제일 맛이 있다. 그리고 아침이면 우유를 배달하고 집에 오시는 게 일이었다. 그렇게 힘든 일을 하니 어머니도 건강이 좋지 않아 접어야 했다.
그런 시절을 보내면서 대학을 포기해야 했다. 친구가 교대를 가자고 하는 이야기도 내게는 허공에 맴도는 메아리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언제 어떻게 되실지 몰라서였고, 내가 부모님에게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았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만 있었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시험은 어렵지 않았지만 시험 보는 것마다 거의 만점 수준이 필요했다. 내게 가산점의 혜택도 없었고. 경쟁률도 거의 50:1이었다. 몇 번 보고는 포기를 했다. 그러던 사이 아버지는 병원에 오래 입원하고 계셨다. 그리고 퇴원을 하시고 이틀이 지나 나는 성당에서 아이들 수련회 교리교사로 참석했다. 아버지는 내게 힘이 없는 목소리로
"백근아! 잘 다녀와."라며 짧은 말씀을 해 주셨다.
"네, 아버지! 갔다 와서는 다른 활동도 줄이고 아버지 곁에 좀 더 있을게요. 다녀오겠습니다."라고 한마디를 남겼다.
그 말이 아버지와 나와의 마지막이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병원에서 퇴원을 할 때 준비를 해야 할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그렇게 빨리 돌아기실 줄은 미처 몰랐다. 그래서 좀 더 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을 만들려고 아버지에게 그렇게 말씀드린 것이었다. 3박 4일의 마지막날 아침에 너무나 이상했다. 집에 전화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가 없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없었고, 그 시간에 기타를 치며 아이들과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어서였다. 어머니는 내게 알리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어차피 오는 날이니 도착할 때 알려주라고, 도착해서야 나는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접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짐은 챙길 겨를도 없이 그저 뛰기 시작했다. 집에 도착했는데 이미 아버지는 병풍 뒤편에 누워계셨다. 지금은 장래를 장례식장에서 하지만 그때는 집에서 장례를 치렀기에 병풍뒤에 모셨었다.
아버지의 병환도 서울의 큰 병원에서는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갈 수가 없었다. 진행하다가 혈관이 뚫리면서 돌아가실 수도 있다고 했지만 돈도 없어서 이기도 했다. 몇 년간을 병치레를 하시면서, 집에 있는 돈은 모두 아버지 병원비로 충당이 되었다. 어머니가 버신 돈들도 생활비와 병원비에 충당을 하면서 어려웠다. 잠시 아르바이트를 했던 나도 겨우 용돈 정도 타서 쓰는 정도였다. 그런데 서울로 간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고, 그런다고 해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의사들의 말이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장례를 다 치르고 집에 있는 재산이라고는 고작 전세금 50만 원이 전부였던 것으로 안다. 그날 이후 나는 선택이라는 것을 할 수 없었다. 선택은 언제나 돈이 있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그저 나는 돈이 되는 일을 해야 했다. 어떤 일이든.
그 해, 그렇게 힘든 여름이 지나고, 목재상에 취직을 했지만 몇 개월을 다니지 못했다. 면허증은 있었지만 운전을 해 본 경험이 없었는데 운전기사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옆에 형님이 계셔서 운전을 알려주시고, 사장님 아들이 알려주시고 했다. 그렇게 함께 운전하는 중에 배달을 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전군, 너 이제 운전할 수 있지?"
"네~에~에"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내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있었는지,
"네 ~ 해보겠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여기로 배달 좀 해주고 와."
"네 알겠습니다."
혼자서 차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조금 운전을 하고 가니 자신이 있었다. 혼자서도 잘할 것 같았다. 그런데 편도 2차선 좁은 길에 앞에서 대형 버스가 오고 있었다. 우측에는 갓길에 차들이 주차가 되어 있었다. 바짝 긴장을 하면서 운전대를 움켜 잡았다. "조심히 천천히 가자."며 천천히 가는데 갑자기 차가 서버리는 것이다. 타이탄 차량의 꽁무니 쪽 모서리에 내 트럭이 찍힌 것이다. 트럭의 탑이 정면이 아닌 타이탄 차량의 중간의 어디쯤을 가리키고 있다. 사고가 난 것이다. 비용이 많이 나왔다. 감사하게도 내게 청구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직장을 잃었다. "전군, 내가 시킨 게 잘못이다. 그런데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라." 내게는 답답한 일이었다. 출근을 하지 말라니,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네"라는 말 밖에는.
잠시 쉬고 있던 나는 성당 누나의 도움으로 겨울에 주류상사에 들어갔다. 거기에는 많은 분들이 있었다. 매일 같이 "야 인마, 이놈의 새끼"라는 말이 난무하는 곳이었다. 시간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면 참 정겨운 말들이었고, 돌아가시고 안 계시지만 그렇게 내게 욕을 했던 현기사님이 눈에 선하다. 욕을 하면서도 항상 따뜻한 분이셨기 때문이다. 사고 전력이 있던 나는 운전을 두려워했지만 그분에게 욕을 먹으면서 운전을 배웠다. 그곳에서도 오래 있지 못했다. 허리에 무리가 있어 통증이 있었다. 유독 같은 욕을 하면서도 듣기 싫은 사람이 있기도 했다. 기억으로 입영에 관한 신체검사가 나왔던 시기로 기억이 된다. 신검을 받으면서 군인에게 "어머니와 동생 둘이 있는데 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소일거리를 하시기는 하지만 제가 없으면 동생들 학교도, 생활도 되지 않습니다. 대학을 가지 않았다고 방위로 보내시면 저는 군대를 갈 수가 없습니다." 방위로 있게 되면 집에서 다니고 돈도 못 버는데 돈을 써야 하는 상황이 된다. 그랬더니 "의가사로 면제를 받을 수도 있으니 신청해 보라고 하면서 자세히 알려주었다." 알려준 대로 준비해서 신청을 했고, 군대를 면제받을 수 있었다.
<2편에서 계속......>
백근시대
ChatGPT 강의 스마트폰 대인관계소통 코칭리더십(리더십) 강의 라이프코칭, 비즈니스코칭 매일 글쓰는 코치 머니프레임 머니코칭 은퇴자 변화관리 청년 현명한 저축관리 매일 글쓰는 코치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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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백근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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